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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창동 아틀리에 小考

초가을 햇살에 잠긴 창동골목을 걸어봅니다.
오래된 골목길 모퉁이에는 가을바람에 마른 국화꽃이 바삭거리고,
이미 하늘길을 떠난 시인의 흔적이 떠돕니다.
창동골목 윗길을 접어들면, 정재관 선생 오래된 집터 ‘응적재(凝寂齎)’ 푸른 잔디가 눈을 편하게 해 줍니다.
평론, 칼럼, 언론인으로 正論直筆 논객이었던 정재관 선생의 집터는 창동정원 카페로 새롭게 꾸며져 이곳의 이름 있는 카페로 오픈되었습니다.
카페에는 창동예술촌 예술가들이 모여, 가끔 커피를 나누며 예술혼을 나누기도 합니다.

잔디가 보이는 창가에는 오늘도 화가들의 웃음소리가 정겹습니다.
유난히 밝고 쾌활한 목소리, 삶의 활기를 느끼게 해주는 정은숙 작가는 TY Gallery 소속이기도 합니다.
창동정원 파란 잔디 너머 2층 창문이 그녀의 화실이라, 내친김에 창동 아틀리에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2층 아틀리에는 4명의 미술작가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이시레물리노 화실
오래된 흔적이 묻어있는 작업실의 입구를 들어서자 물감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 가득합니다.

눈에 들어오는 작품을 바라보며 문득 앙리 마티스를 떠올려봅니다.
화실 한쪽에는 해금이 동그마니 앉아있고, 작은 풍금 같은 건반악기...
느릿한 클래식이 정돈된 화구사이로 흐르는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
음악과 색채는 동일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말할 것도 없이 공통적이다. 일곱 개의 음표에 조금만 변화를 주는 것으로도 가장 찬란한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시각 예술에서도 그렇게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라는 앙리 마티스의 목소리가 작품사이로 들리는 듯합니다.
정작가의 묵은 화실은 음악이 흐르는 달콤한 와인  'Petit Salon'에 앉은 듯 편안합니다.
작품 속의 검은 피아노, 해금은 화가의 마음에 내재된 마티스의 오달리스크’. 그래서 삶(영혼)의 피로를 어루만지듯 위로해 주는 악기.

앙리 마티스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음악><삶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나는 자연에 맹종하는 복제품을 만들 수는 없다.
대신 나는 자연을 해석하고 그림의 정신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느낀다.
색채를 한데 칠할 때 그것들은 살아 있는 화음이나 색채의 조화 속에 연결된다. 마치 음악의 화성이나 화음처럼” <앙리 마티스>

정작가의 화폭에는, 시골풍경을 그리며, 들판의 냄새와 소리까지도 모두 받아들여야 하듯, 화가의 내재적 상상력을 충분히 끄집어내어 주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삶의 중요했던 일들은 결국 그 시간이 지나 봐야 깨닫게 되듯, 삶을 표현하는 색채는 오랜 훗날의 기억을 빛으로 표현하는 영혼의 도구. 하지만 그 빛은 현실에 존재하는 빛, 또한 화가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빛이다. 시간은 천천히 지나온 것이 아니라, 시간여행자가 되어 이리저리 뛰어넘어 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각은 不惑(마흔), 표현은 而立(서른)이랄까...

색채에는 각기 특징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
마치 음악에서 음향을 보존하도록 애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직의 문제, 색채의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보존해 줄 배열을 찾아내는 문제이다 “ <앙리 마티스>

루이 아라공()고통이라는 글자를 통해 사랑에는 고통과 눈물이 수반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작품세계를 바라보며 삶은 고통이라 부르기보다는 환희라는 단어를 더 떠올리게 만듭니다.
살아오며, 단단하고 뾰족하게 날 선 고통을 억지로 가슴에 넣고 조금씩 조금씩 둥글게 만드는 것이 남겨진 이들의 삶이었듯, 작가의 화폭은 연초록, 연보라, 연주황의 부드러운 색채를 통해 하늘거리는 촛불처럼 따뜻했고, 오래 숙성된 와인처럼 깊고 부드럽게 내 입술에 다가옵니다.

같은 술과 음료라도, 어떤 비율로 혼합하느냐에 따라 다른 맛이 나고, 담는 잔과 장식에 따라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듯, 과감하게 자리한 검은 피아노와 건반사이로 스며든 해금의 선율이 파스텔 톤의 부드러움에 휘감긴 환희의 축제’ 사이로 잘도 어우러져 춤춥니다.

아프고 괴로운 날을 쏙 빼버린, 즐겁고 기쁜 날만 모아 구성된 아름다움,
‘Song of Life’는 색색의 빛이 만개한 '우주정원'이며, 입안에 감도는 달콤한 와인 향의 그윽한 맛.

가끔 씁쓸하고 찹찹한 '참이슬'의 삶을 즐겁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작가는, 자유와 쾌락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어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 다 쏟아붓는 것만이 삶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