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걷기~물방울의 합창
삿포로의 봄은 지난겨울 참 멀리도 여행을 떠났었나 봅니다. 4월이 훌쩍 넘은 지금, 상습 지각생 봄은 저 너머 언덕에서 아침 햇살에 조는 고양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고국은 지금 벚꽃이 벌써 졌는데, 삿포로의 봄은 아직 저만큼 있습니다.
어젯밤은 비가 내렸습니다.
여명(黎明)에 쌓인 숲은 새벽별이 쏟아져 물방울 되어 영롱합니다. 숲은 곧 조용한 합창이 시작될 듯 고요합니다. 경탄스러운 친밀감으로 엉겨 붙은 방울들은 낮은 가지로 흘러내리며 겸허의 떨림을 만들고, 나무는 마치 선율에 취한 지휘자처럼 온몸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후드득,
새벽기도 나서는 외할머니 등 뒤 마른기침처럼, 무거운 짐을 주체 못 해 떨어져 내리는 몸이, 잘게 부서지며 아직 잔설(殘雪)이 남은 숲 바닥을 적십니다. 오래전 하늘을 향한 외할머니의 기념(祈念)이 수십 년이 지난 이제야 녹나무 커다란 구멍을 통해 수념(授念)의 기쁨으로 돌아왔나 봅니다.
숲길은 촉촉한 습기로 오히려 온화합니다. 발끝으로 스며드는 물기로 온몸이 젖어드는 느낌입니다.
물방울 소리가 귓속을 맴돌면, 스르륵 흘러내리는 소리에 마음의 창문이 열립니다. 가장 낮은 그곳, 떨어질 듯 말 듯 흔들리는 안쓰러움 속에서 그리도 기다리던 봄을 만납니다.
반평생을 노력한 사람은 남은 반평생 동안 그 결실의 긴 기쁨을 맛보지만, 순간의 노력으로 얻어낸 즐거움은 그 기쁨이 잠시를 넘기지 못합니다.
나뭇가지의 물방울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뎠을까?
물방울은 선캄브리아대의 냄새를 기억하고, 그 옛 기억으로 미세한 봄의 세포로 가득 채워진 유기체를 만들어냅니다.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에는 표면장력의 섭리가 이어지고, 아득한 약속이 시간의 퇴적으로 쌓인 결정체를 이룹니다. 그 결정이 큐빅의 모양이었다면 숲은 꽉 찬 물방울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둥근 물방울 사이로 보이는 숲은 오히려 느슨합니다.
물방울 하나 만들어지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이 봄도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귀한 봄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방울처럼 하찮은 것이라 여겨 습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 중요한 현상들이 즐비합니다. 눈여겨보면 숲은 인류의 어머니이고,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은 어머니의 눈물일지도 모릅니다. 어려운 삶으로 두려움을 느낄 때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물방울 속에는 긍정적 이미지인 ‘이마고(imago)’가 스며있어 우리의 불안했던 마음을 어머니의 품에 편안히 있게 해 줍니다..
세상에는 세면대 거울에 물방울이 튀길까 걱정되어 손을 자유롭게 씻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병이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처럼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오히려 남을 충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남을 알기 위해서는 남의 말과 숨소리를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물방울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함께이며, 다살이의 삶인 물방울에게 고집과 독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방울은 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뛰어난 청각의 달인이며, 공간 네트워크의 귀재입니다.
바쁜 사람들은 언제나 외관을 견고히 하는 포장용 시스템에 갇혀 살기에 입술 끝에 늘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삽니다.
물방울은 바쁘지 않습니다.
물방울은 여유 있게 천천히 움직이며 수시로 다른 물방울과 함께합니다. 결코 홀로 있지 않으며 그래서 외롭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지도(地圖)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지도는 복잡한 세상을 엄격하게 정리해놓은 편리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인생을 지도처럼 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개미의 부지런함보다 베짱이의 감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방울의 세계는 지도가 필요 없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자연의 섭리에 따른 중력의 법칙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창궐해 세상이 어둡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말해줄 겁니다. 우린 그까짓 코로나를 이기고 살아남아서, 이 시절을 회고하며 더 풍요롭고 안락한 환경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벌써 반은 이겼고, 끝이 보입니다. 엄격한 지도(地圖)보다는 이 어려운 난관을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굳은 빵을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은 갓 나온 따끈한 빵 사이에 딱딱한 빵을 가만히 두면 된다고 합니다. 따스한 빵의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감싸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쁘고 힘들다 보면 배려를 잊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먹어야 삽니다. 마스크 너머로 웃음과 껴안음을 먹어야 삽니다.
봄이 촉촉이
물방울을 먹는 것처럼...................
아사이야마기념공원 숲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