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기행~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 전남 남원시 산내면 장항리 장항마을, 지리산 둘레길 인월-금계 구간을 따라 중군마을-수성대-배너미재를 지나면 장항마을 윗 당산 언덕에 노루목 당산 소나무가 의연히 서 있습니다. 이 당산이 있는 자락은 앳골로, 마치 노루가 목을 길게 내민 형국이기 때문에 옛 이름을 노루목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노루 장(獐), 목 항(項)자를 써서 장항마을이라 부릅니다. -
여름 숲에는
초록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숲은 첫여름 햇살 머금어 초록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어찌 그 뜨거운 햇살이 초록으로 변하는지 한 치 앞을 못 보는 어리석음이 안타깝습니다. 봄의 색깔이 연두 빛이라면 여름 숲은 이제 청년기에 이르러 진초록입니다. 그래서인지 숲을 걸으면 휘파람새라도 된 듯 콧노래 소리로 온몸이 가벼워집니다.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여 여린 봄꽃이 한창이던 숲길도 무성한 나뭇잎의 기세를 꺾기에는 부족 한가 봅니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는 옛말을 떠올리며 걷노라면 자연도 그러하듯 우리의 삶도 초록의 물결처럼 때가 있는 듯합니다.
휴일이면 이제는 발길이 저절로 숲으로 향하는 것은 아마 삶의 연륜이 익은 탓이요, 지친 도시생활을 통해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과의 부대낌을 잊고 수풀과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한 유불리(有不利)를 따지는 사람과의 만남보다는 자연 그대로 인 숲이 주는 순수함이 편안했던 까닭이기도 하지요.
숲을 걷는다는 것은 바쁜 삶에 대한 되돌아봄이요, 지친 삶에 대한 쉼이요, 앞으로 걸어갈 삶에 대한 재충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숲은 어릴 적 안겨보았던 어머니의 포근한 품처럼 아늑하기만 합니다.
숲 언저리에는
엉겅퀴의
강렬한 자줏빛이
인월∼금계 구간에서 으뜸 숲길은 중군 마을에서 장항마을까지라고 합니다. 중군 마을은 조선시대 전투 군단이 전군, 중군, 후군, 선봉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이 마을에 중군(中軍)이 주둔했기 때문에 마을의 이름이 ‘중군리’, ‘중군동’이라 불리어졌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는 하지를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동네 부인들이 머리에 ‘키’를 쓰고 마을 앞 냇가에서 통곡을 하면서 ‘무제’를 지내던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마을을 오른쪽으로 끼고돌면 계단식 텃밭이 펼쳐지고, 곧 황매암으로 가는 언덕길이 보입니다. 황매암은 출가해서 50년째 선(禪)수행 중인 범어사 동산스님의 막내 상좌 일장 스님이 조용히 참선 정진하고 있는 암자입니다. 숲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황매암 ‘석천’ 맑은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황매화에 슬며시 눈길을 주어봅니다.
황매암을 지나면 구불구불한 숲길이 이어집니다. 숲 속에는 보석같이 빛나는 산수국, 부끄러워 옴츠린 물꽈리아재비, 카이젤 수염을 자랑하는 큰까치수영, 강렬한 자줏빛 엉겅퀴 등 여름 들꽃이 발길을 유혹합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노각나무 하얀 꽃이 흰 소복 여인처럼 숲을 환하게 밝혀주기도 합니다.
잠시 숲길을 숨차게 오르내리면 맑은 물소리가 청아한 ‘수성대’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수성대는 조선시대 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복한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맑은 계곡물을 바라보며 흐르는 땀을 식히고 있노라면 숲 사이에서 수성군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수성대 맑은 물로 빚은 시원한 막걸리 한잔은 도시의 그 어떤 맛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배너미재 숲으로
부는 바람은
부드러운 손길
수성대 물소리를 뒤로 두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으면 숲은 더욱 깊어지고 노각나무 군락이 다양한 숲의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언덕을 숨차게 오르다 보면 계곡 물소리가 잦아들고 배너미재를 만납니다.
배너미재는 까마득한 석기시대, 운봉이 큰 호수였을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의 운봉 ‘주촌리’는 사람들이 고리봉(배를 묶어두는 곳)에 배를 매고 고기잡이 생활을 하였다 하여 배 주(舟)자를 써서 ‘배마을(舟村)'이 되었고, 나중에 ‘배말’ 또는 ‘뱃물’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 숲이 옛날에는 호수였다니...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 끝머리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배너미재에는 오래된 서어나무 한그루가 걷는 이의 그늘이 되어 고개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서어나무는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배너미재의 흔적을 그 속에 담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달콤한 속삭임, 산행 길에 지친 노부부의 푸념과 장난기 어린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배너미재의 갖은 이야기를 뒤로 두고 오솔길을 걷다 보면,, 정겨운 고사리밭길을 지나 시야가 확 트이며,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반깁니다. 400년 동안이나 장항마을을 지켜온 노루목 당산 소나무는 함께 살아왔던 마을 사람들의 숱한 희망과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듯 서있습니다.
숲길을 걷는 것은 삶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쉼을 만끽하는 행복한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배너미재 숲으로 부는 바람은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그 부드러운 손길을 그저 내밀어 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