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기행

숲기행~서산대사가 걸었던 길

수풀7 2021. 8. 18. 12:25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 지리산 옛길 신흥-의신 구간을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계곡. 신흥사가 있었던 신흥마을과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마을을 연결한 4.2km의 이 길은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머무르는 동안 오가던 마을과 마을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옛길입니다. -

물까치의 본능이
나그네 마음을
짠하게 만들고

숲으로 가기 위해선 ‘바쁨’은 저 멀리 던져버려야 합니다. 숲은 바쁜 일상이 묻은 흔적을 썩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발자국 소리도 낮추어 숲길을 들어서면 소나무 거친 껍질과 개다래 덩굴이 서로의 몸을 부비며 세월을 삼킵니다. 숲길 언저리 빈집의 들마루엔 한껏 피어난 개망초가 더운 꽃잔치를 벌이며 며칠 전 지나간 산객의 이야기 소리를 되새기곤 합니다.
하늘 높이 솟은 참나무 숲 사이로 물까치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낯선 나그네를 뒤쫓으며 경계심을 발합니다. 미물이나 사람이나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가족 사랑이 지극한 물까치의 본능이 나그네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어 줍니다.

숲 속은 오도 가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나무 그림자뿐, 산들바람만이 여린 가지를 흔듭니다. 우뚝 선 나무는 마음의 바닥으로 흐르는 상념을 자화상처럼 땅 속 깊은 곳으로 뿌리내립니다. 뿌리의 깊이가 나무의 겉모양과 같음도 이런 연유에서 이었나 봅니다.
계곡물 따라 꿈처럼 불어오는 산바람은 등어리에 해 그림자 한 줌 얹어 놓았습니다. 옛길의 아득한 기억 같기도 하고, 지친 서산대사의 발걸음 같기도 한 해 그림자를......

신선이 사는
항아리 속
별천지

화개동천(花開洞天)신선이 사는 항아리 속 별천지라 불립니다. 신선이 사는 항아리는 어떤 곳일까? 궁금증이 발동합니다.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쯤은 일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요.
십리 벚꽃길을 따라 오르면 계곡 물소리가 청아합니다. 꼬불꼬불 산길을 돌면 500년 된 푸조나무 한그루가 왕성분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곁에 두고 의젓합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세상을 버리고 지리산 깊은 골로 들어가기 전 맞은편 세이암(洗耳岩)에 앉아 더러워진 귀를 씻은 후, 의지하던 지팡이를 꽂아놓고 산으로 들어가며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자신도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학을 타고 속세를 떠났다는 전설이 아련합니다.
들려오는 세상 소리가 얼마나 역겨웠으면 자신의 귀를 씻었을까? 고운 선생도 들리는 세상 소리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나 봅니다. 맑은 계곡의 물소리를 뒤로하고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신흥교 곁으로 지리산 옛길로 접어드는 홍살문에 신흥의신 옛길이라는 글귀가 눈에 띕니다.서산대사길을 접어드는 이곳부터 숲길은 시작됩니다.

서산대사는 이 길을 걸으며 세상의 모든 번뇌를 흘러가는 계곡물에 흘려버리고 청아한 물소리만 빈 바랑에 채웠을 것입니다. 땀을 흘리며 고갯길을 오르면 돌 의자 하나 댕그라니 놓여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와 의신사를 불태우고 범종을 훔치러 하자 서산대사가 도술을 부려 범종을 돌 의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차가운 돌 의자에 걸터앉아 흐르는 땀을 씻으면, 서산대사를 향한 민초의 믿음과 고승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벽소령은
이념 대립의
격렬한 교전지

끝없는 숲길은 어지러운 마음속을 헤매듯 휘돌아 이어집니다. 갖은 번뇌와 잡생각이 걷는 발의 먼지처럼 붙었다 떨어지면 숲은 고요히 말이 없습니다. 고운 선생도 서산대사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숲을 오르내리다 보면 커다란 바위 아래 토종벌을 키우는 벌통이 여럿 눈에 띕니다.. 무심히 꿀을 나르는 벌들을 지켜보며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습니다. 잠시 무너져 쌓인 돌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식히면 아득한 옛날 산중의 귀한 소금을 팔러 다니던 소금장수의 발길을 생각나게도 합니다.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벽소령은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이념 대립과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성계곡에 숨어있던 빨치산과 토벌대의 격렬한 교전으로 빨치산 남부군과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합니다.
옛 의신초등학교 자리에는 지리산 역사관이 있어 지리산 속에서 살아왔던 주민들의 삶의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역사관에 전시된 설피에서 다래 덤불과 물푸레나무를 휘어 만든 옛사람의 지혜를 보며, 서산대사가 남긴 시구눈 덮인 들을 걸어갈 때(踏雪野中去)’가 떠오릅니다.

서산대사길은 바쁨을 멀리한 자에게만 편안한 시간을 허락하는 것 같습니다. 뉘엿 기우는 해를 뒤로하며, 여행은 돌아올 수 있으나 삶은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이라는 뜻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