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걷기~미우라 아야코의 숲에서 보내온 편지
요즘은 틈이 나면 한가히 숲을 걷는 것이 일상의 茶飯事가 되었습니다. 천천히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차를 마시는 것은 그 맛을 느끼기보다는 김이 오르는 찻잔을 바라보며 멍하니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한자말에 ‘끽다(喫茶)’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중국의 옛이야기 ‘끽다거(喫茶去)’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상대적 사유를 초월한 평상심 즉 ‘차나 한잔하지 그래...’라는 뜻을 가집니다.
삿포로에는 유난히 찻집이 많습니다. 일본의 찻집을 ‘喫茶店(킷샤텐)’이라 하는데, 공손한 주인이 직접 간단한 식사와 갖가지 디저트를 대접하는 가게를 말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킷샤텐’에서 한가히 앉아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친구를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차와 다과를 즐기는 관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풍경은 바쁜 우리나라에서는 주인에게 쫓겨나기 십상인 보기 힘든 장면이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의 눈높이에는 참 행복한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숲 언저리 작은 찻집에 초여름 햇살이 기웃거립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커피 냄새 구수한 찻집에 앉아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의 안내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간단한 토스트와 곁들인 커피가 맛있는 냄새를 풍길 즈음, 탁자 건너 왜소해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꾸부정한 어깨로 창 너머 숲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그 모습은 오래전 잡화상을 운영하며 글을 쓰던 미우라 아야코가 차 한잔을 두고 초고를 정리하며 자신의 마음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기념문학관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낮잠이라도 한숨 자야 할 것 같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을 뒤로하고 숲길을 걷습니다.
숲은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점점 어두워지고, 숲 속으로 쾌활한 요코와 오빠 도루가 뛰놀고 있는 듯합니다. 이 숲은 특별히 ‘외래수종견본림’이라는 이름처럼 유럽의 여러 종류 나무를 홋카이도에 옮겨 심어 잘 자랄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특별한 숲이기도 합니다.
숲 속에는 스트로브잣나무, 몬티코라잣나무, 레지노사소나무, 리기다소나무, 루브라참나무, 사이프러스, 자작나무, 가문비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유럽 및 북미산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숲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두 번째 남편인 ‘미우라 미츠요’가 아사히카와의 숲을 관리하는 공무원으로 일했다는 기록을 읽어봅니다.
미우라 미츠요는 숲을 가꾸며, 아내의 글쓰기를 도왔다고 합니다.
나무는 숲을 이루고, 숲은 우리의 마음에 붓으로는 그릴 수 없는 풍경을 그려줍니다. 숲길을 걸으며 아야코는 숲을 가꾸는 남편의 마음을 느끼고, 닮아가기를 원했을 겁니다. 더 넓은 숲의 포용력과 침묵 속의 위로는 얼어붙은 마음의 빙점(氷点)을 녹이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거듭날 수 있으며, 하늘이 주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아야코의 목소리는 소설 속의 요코를 통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으로 이끕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삶에 무슨 확실한 기쁨이 있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빙점(原罪意識) 곁에 서성이며 큰 나무가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아야코는 요코를 통해 하늘로부터의 화해와 사랑이 늘 우리 곁에 있음을 증거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빙점에는 드러나 있지 않으나 녹아있는 미츠요의 숲 향기가 있습니다. 아야코는 남편의 숲을 통해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마음의 빙점’을 하나님의 사랑이 포용하고 녹일 수 있다는 진실을 자신의 글 속에 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전헌, 조현용 선생님의 ‘몸이 되는 말’을 읽으며 ‘읽었다는 말은 그 글을 이해했다는 뜻’이며, ‘알았다는 말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의 히브리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야코의 숲을 걸으며 그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숲을 가꾸었는지를 읽고, 아야코의 ‘빙점’이 미츠요의 숲과 하나였음을 깨닫는 기쁨을 얻습니다.
숲은 수만 년 전의 냄새를 잘 간직하는 유전자를 가졌습니다. 그 의미 있는 냄새를 숲은 어떻게 잘 기억해낼 수 있으며,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에 전할 수 있는지... 경이롭습니다.
미우라 아야코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