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숲~생태맹
“벚꽃 봉오리가 얼마만큼 커졌는지 잘 보고 와야 해”
동네 어귀에 서있는 벚나무를 요리조리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온 아이는 꽃봉오리의 모양과 크기를 설명하느라 끙끙댔습니다. 힘든 몸 표현이 계속되었지만 엄마의 마음속은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아이의 표정도 우스웠지만 안간힘을 다해 나타내려는 꽃봉오리를 상상하며 다가오는 봄을 슬쩍 훔쳐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태맹이란?
지금은 누구나 바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 밖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지요. 과거에는 일상생활을 통해 자연스레 자연의 섭리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자연을 찾지 않으면 흙냄새를 맡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연과의 단절이랄까? 이런 현상을 요즘 들어 ‘생태맹’이란 단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태맹(Ecological Illiteracy)’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각종 환경문제와 위기의 근원이 되고 있는 사람과 자연과의 왜곡된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성적 삶을
자연 해득 능력은 단순히 생태학적 지식이나 동식물의 이름을 식별할 줄 아는 능력에 국한되지 않고 통찰력을 가지고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자연과 우리의 정신이 서로 교감하며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폭넓은 개념이지요. 지성보다 감성과 더 많은 연관성을 갖고 자연계나 생명현상에 대한 지식만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 내부에 가만히 지니고 있는 생명 현상에 대한 호기심, 경외감, 생명체나 생명 현상에서 유연성(類緣性, Affinity)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삶을 말합니다.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은 농업전문가들과 조류전문가들이 자기 분야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못했을 때 식량 생산체계와 조류 수효의 감소 간의 상관관계를 감성적 시선으로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생태맹을 극복하려면
생태맹을 극복하지 못하면 생명현상이나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중심적, 좁게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지혜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옛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을이 되면, 감나무 꼭대기에 감을 두어 개쯤 남겨놓았지요. 겨울에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까치의 먹거리를 마련해주었던 겁니다. 또 수채에 물을 버릴 때도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곤 했습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작은 벌레를 생각해서였지요. 비록 생태학적 지식은 없었다 하더라도 자연을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생태맹은 끊어져 있던 자연과 사람과의 연관 고리를 다시 잇고, 나와 자연이 하나이며 서로 교류하는 순환적 세계관과 연기적(延期的) 철학을 회복하면 자연히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굴참나무 가지에는
숲으로 가면 굴참나무 가지 위에 도토리거위벌레가 살고 있습니다. 암컷이 도토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있을 때, 수컷은 짝짓기를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요. 방해꾼인 옆집 수컷이 나타나면 싸움질을 하며... 이윽고 암컷이 뚫어놓은 구멍에 알을 낳고 나뭇가지를 자르기 시작하지요. 드디어 알이 담긴 도토리 가지가 땅에 떨어지면 도토리 속 알은 암컷이 마련한 도토리 도시락을 먹으며 애벌레가 되어 겨울을 나기 위해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작은 도토리 속의 세계처럼 우리도 자기가 위치한 삶을 중심으로 작은 부분부터 변화를 이루어 내야 합니다. 그 변화는 우리 삶의 내부를 지향하는 것이며, 무심히 지내기 쉬운 사무실 동료와 옆집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작은 가치를 존중하며, 바쁜 도시의 일상 속에서 내일로 치닫기 쉬운 마음을 지금에 집중하여 ‘빨리빨리’보다는 시나브로 사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살펴보면 작은 것 없이 큰 것은 없습니다. 물과 이끼 사이에 풀과 떨기나무가 함께 있어 덤불을 이루고, 덤불은 큰 나무와 새와 짐승, 곤충이 흙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생명이 가득한 숲이 되듯이 사람과 사람이 조화롭게 어우러짐으로 아름답고 살맛 나는‘숲 사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