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숲

치유의 숲~숲생태와 마음치유

수풀7 2020. 4. 27. 11:46

초등학교 시절이었던가...
그 시절에는 누구나 가난해서 먹거리와 입을 거리가 변변치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랫 골목에 사는 친구는 뽀얗고 통통한 손에 늘 맛있는 과자를 들고 허기진 우리의 배를 자극했던 오래된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린 소견에 난 왜 이리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 먹고 싶은 과자도 마음대로 못 먹고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원망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숲의 삶에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시간과 장소뿐만 아니라 여건까지도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를 부여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불공평하게 생각하고, 태어난 환경을 억울하게 여기는 원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부여한 숙명(宿命)이기도 합니다. 숲도 그렇습니다. 성숙한 씨앗이 자신을 어버이로부터 분리하여 옮겨주는 바람, 마음 착한 곤충, 영문 모르는 작은 새를 만나는 그 순간부터 숙명은 예비됩니다.. 씨앗이 어디에 떨어지느냐 하는 순간부터 씨앗의 운명은 결정되어, 한 곳에 머물면 더 이상 떠날 수 없는 나무의 숙명처럼 그 장소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러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장소가 거친 바위틈이건, 축축한 습지 건 간에...

숲을 걸으며
숲길을 걸으면 여러 모양의 나무와 풀을 만나게 됩니다. 수형이 곧게 뻗은 편백, 구부러져 허리가 휘청한 소나무, 머리를 풀어헤친 국수나무 등등... 그중에서도 칡넝쿨에 쌓여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졸참나무를 만나며 숲의 불공평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하필이면 칡넝쿨은 졸참나무를 택해서 자신의 삶을 끈질기게 유지해야만 하고, 그 불공평한 선택을 졸참나무는 숙명처럼 받아들여 숲에서의 지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이 아립니다. 아마 모든 생명은 하나의 주체로서 살 권리와 능력을 이미 그 씨앗 안에 부여받고 태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이러한 섭리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삶의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는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숲은 자신이 지닌 본래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삶이 행복해진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보다는 자연이 생명에 부여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숲에서 배우다
우리 삶은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을, 선택과 그 결과의 집합물이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 속에 이미 계획된 삶이 존재한다 하드라도, 매 순간의 선택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삶이 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사람의 삶이 그러하듯 나무는 온전히 서 있는 채로, 태어난 자리의 환경과 주변과의 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필연의 공간과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스스로 선택하여 빛의 방향으로 잎과 가지를 키웁니다
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적 여건 속에서도 불평 없이 묵묵히 그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즐거운 에너지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래서 숲에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억울하다고 분노하는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본 적이 없습니다.

더불어 숲
숲의 생명체들이 숙명을 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내 가슴에 오랫동안 차지했던 알 수 없는 억울함을 씻어줄 수도 있습니다. 숲의 생활사를 통해 자신을 반영할 수 있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명상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긍정적 심리 변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숲길을 걸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침묵과 평화, 이해와 배려의 심리적 성숙을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숲에서 홀로의 시간은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통해 자신의 미약함과 약점을 인정하는 겸손을 배우기도 합니다. 숲은 자신의 숙명을 온전히 받아들며, 발아한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들만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올봄에는 꽃향기 그윽한 숲길을 걸으며 숲의 겸손을 통해 메말랐던 마음을 치유받는 감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