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걷기~샤코탄에서 챠렌카의 그리움을
샤코탄~
짙은 코발트 빛 바다가 그리워 망망한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땅끝.
바닷바람 맞은 소금빛 하얀 등대 외로이 서 있는 곶(串).
이국의 언어지만 그 뉘앙스에서 풍기는 그리움이 저절로 걸음을 이끕니다.
우리는 늘 그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때 목걸이를 두서너 개 걸쳤던 어릴 적 친구에 대한 그리움,
구수한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고향마을에 대한 그리움,
학창 시절 뒹굴고 놀던 교정에 대한 그리움,
먼 이국으로 떠나버린 이웃에 대한 그리움,
허공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하늘을 향한 그리움,
뙤약볕에 파르르 떠는 꽃잎의 바람에 대한 그리움,
간절한 기도 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
얼마 전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가장 사무치는 그리움은 사랑하는 이의 떠남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먼 옛날, 적에게 쫓기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라는 장수가 '에조'로 피신 와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아이누 족 추장의 딸(챠렌카)이 요시츠네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쫓기던 요시츠네는 다시 에조를 떠나야 했고,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챠렌카(チャレンカ)는 요시츠네를 찾아 '카무이미사키'까지 이르렀지만 요시츠네의 배가 바다를 향해 떠나간 뒤였습니다. 챠렌카가 카무이미사키의 절벽 끝에서 바다를 향해 요시츠네를 목놓아 불렀지만, 무정한 요시츠네는 저 먼 수평선을 향해 떠나버렸습니다. 낙심한 챠렌카는 "여자를 태우고 이곳을 지나는 '와징'의 배는 모두 침몰하리라."는 말을 남긴 채 바다로 몸을 던졌고, 챠렌카의 몸은 '카무이이와(神威岩)'라는 바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여자를 태운 배가 카무이미사키를 지나가게 되면 모두 침몰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습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너머로 카무이(カムイ-아이누 어로 '신의 위엄'을 뜻함)로 가는 '챠렌카의 오솔길'이 이어집니다. 길이 시작되는 언덕에는 '카무이미사키(女人禁制の 地, 神威岬)'라고 적힌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문 너머 카무이미사키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오솔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초여름을 알리는 원추리의 노란 물결이 요시츠네를 향한 챠렌카의 그리움을 말하는 듯 흔들거리고, 해당화(하마나스) 붉은빛은 챠렌카의 슬픔처럼 피어납니다. 낭떠러지 아래로는 짙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장관은 이름 그대로 '샤코탄 블루'입니다.
챠렌카의 전설은 어쩌면 자신의 땅을 잃은 아이누 족의 슬픔을 챠렌카에 빙의(憑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누 족의 신성함이 결결이 숨어있는 샤코탄 '카무이의 땅'에서 애절한 챠렌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숨소리에서 오히려 평온과 환희와 귀의(歸依)를 배웁니다.
우리는 세상을 걸으며 그 땅에 흔적을 남깁니다. 비록 바람이 조금씩 그 흔적을 지운다 할지라도 우리가 걷던 길 위에는 약간의 먼지 같은 생각이, 그리움의 흔적이 남을 것입니다. 아직 걷는 길의 끝은 없습니다.
에조 : 일본으로 흡수되기 전 홋카이도의 옛 지명
사람들은 대체로 일본 본토에서 홋카이도로 일본 열도의 문명이 넘어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홋카이도가 아이누의 독립된 땅이었고, 그네들은 바다를 통해 사할린의 아이누들, 심지어
쿠릴 열도의 아이누와 하나로 연결된 동일한 북방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홋카이도와 사할린, 연해주와
아무르 강 하구, 쿠릴 열도의 북방 문명권은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이다.
-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제주대 석좌교수) -
와징 : 아이누 족이 부르던 일본인의 별칭
~ 샤코탄에서 챠렌카의 그리움을 ~
흰점박이꽃무지의 샤코탄 걷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