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기행

숲기행~남해 물건방조어부림을 찾아서

수풀7 2020. 8. 10. 13:04

눈꽃빙수처럼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물건리 해안길을 걸어봅니다.
먼 수평선 너머 거품처럼 파도가 밀려오고, 외딴 고깃배 한 척 여유롭습니다.
수건 모양처럼 생겨, 한자 건()과 비슷해 물건(勿巾)이라 불렀다는 물건마을에는 수건처럼 기다란 초록숲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물건리 사람들은 동이 트기도 전 저 먼 수평선을 향해 노를 저어 나갑니다. 거센 물살을 헤치며 가난한 식솔의 배를 채우기 위해 떠나는 늙은 어부의 손바닥은 갈라질 대로 갈라져 밭이랑을 옮겨 놓은 듯합니다.

삼천포에서 창선대교(남해사람들은 창선삼천포대교를 창선대교라 부른다)를 지나면, 죽은 창선 사람 한 명이 산 남해사람 10명을 감당한다는 창선면을 지나 한적한 갯벌이 펼쳐집니다. 곧이어 흐르는 바닷물을 이기며 죽방렴 멸치 비늘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창선교를 지나 꽃내마을을 뒤로하면 언덕 위로 옅은 황갈색 지붕이 이국적인 독일마을이 눈에 들고, 바닷길 아래로 길게 뻗은 물건숲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해안을 따라 펼쳐진 길이 약 1,500m, 폭 30m의 마을숲으로 370여 년 전 전주 이 씨 무림 군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조성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이팝나무는 서낭당 나무로 생명을 다하고 이제는 그 옆자리 팽나무에게 음력 10월 보름날에 제사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빌고 있습니다.

언덕에 서서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초록숲을 바라보면, 그 기다란 숲 속의 아득한 옛이야기 소리가 독일마을 언덕까지 들리는 듯 도란거립니다.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이 숲은 꽤 길어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으려면 옛이야기 한편은 족히 들어야 할 듯합니다. 말없이 숲을 걸으며 숲이 들려주는 바람소리와 간간이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오묘한 화음으로 인해 언어의 유희는 한갓 싸구려 포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숲의 나무는 제멋대로 자라서 그 가지가 해안가로 뻗어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로 물고기 떼를 유인합니다. 마치 이누이트 족이 숲을 조성하여 연어를 유인하는 것처럼... 그러면 물건마을 사람들은 숲 양쪽에다 야무지게 새끼를 꼬아 그물을 칩니다. 숲 그늘에 고기가 모이면 큰 고함소리와 함께 육지 쪽으로 줄을 힘껏 당겨 물고기를 잡습니다.
이 방법은 전통어업방식 중 하나인데 일명 ‘가 후리’ 혹은 '후리기'라 부른답니다. 어려운 시절 고기잡이를 위해 숲과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았던 거지요.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아니더라도 물건리 사람들은 자연의 거대한 힘에 잘 순응하며 숲을 가꾸며 살아왔습니다.

숲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줍니다. 숲은 온통 초록! 그래서 사람들은 숲을 찾고 숲에서 포근함을 느낍니다. 숲은 왜 우리에게 마음의 안정과 아늑함을 주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약 200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 사바나 숲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긴 굴속으로 기어들어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숲이 개인이나 종족의 생존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연에 대한 애착과 회귀본능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인간은 자연 회귀의 본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지금도 고요한 숲에 들어서면 더할 수 없는 마음의 안정과 포근함을 얻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바로 엊그제 숲에서 나와 잠시 도시생활에 익숙해 있으며, 나이 들어 힘없어지면 어릴 적 친구가 있고, 기댈 친척이 있는 본향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숲은 바로 우리의 고향입니다.

물건리 마을숲을 걸으며, ‘죽은 나무가 없는 숲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어느 생태학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숲 사이 널브러진 썩은 나뭇가지의 지난 기억들을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