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걷기~토카치다케를 오르며
서툰 걸음마는 우리를 웃게 만들고,
서툰 눈물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며,
서툰 헤어짐은 준비되지 않은 아쉬움으로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삿포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에 좋은 친구를 얻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함께 참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가을이 가만히 내려앉은 '토카치다케'를 함께 오릅니다. 마가목 붉은 산등성이를 오르며 산은 참 아량이 넓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친 사람, 화난 사람, 실망한 사람, 기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없이 다 받아주는 산의 포근함을 만끽하며, 지녔던 아쉬움을 한발 한발 산자락에 내려놓습니다.
떠나왔던 도시의 삶에서는 '면역적 경계선'으로 인해 안과 밖,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하찮은 마스크로라도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했었습니다. 또한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쏟아지는 정보로 생겨난 너무 많은 생각과 집중은 오히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생각의 경계선'을 만들어 우리를 편안한 소통으로부터 격리시키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집단적 연결의 힘은 군중집회였고, 밀집된 공간에서 사람끼리 부대끼며 직접 연결되어야만 했습니다. 사회변화가 그동안 오프라인에서의 연결과 교류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이었다면, 지금의 시스템은 온라인에서의 연결과 교류를 오프라인과 병행시키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언컨택트는 무조건적 단절이 아니라 컨택트 시대로의 더 나은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컨택트는 어쩌면 오히려 더 큰 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규정을 이미 여러 철학자로부터 받아버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싸움의 뒷 순서로 '두문불출'이라는 자기 아집을 내세웠지만, 언컨택트 시대에는 어울리지도, 어느 누구의 긍정적 시선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 둘레에는 카톡, 메일, 트위트, 페북,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가 '홀로서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연결되고, 소통하고,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언컨택트가 능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 숨 쉬는 '뉴언컨택트 사회'를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일부 젊은이에게서는 관계에 대한 단절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계와의 소통에 익숙한 신세대가 자기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과 다른 컨택트 시대의 사람과 만나는 소통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걱정이 됩니다. 지금껏 언컨택트 시대로의 변화는 느리고 완만하게 어어졌지만,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등장으로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리 진행되었고, 결국 우리는 급속히 '뉴언컨택트 시대'로의 사회적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토카치다케 숲 속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잎에서 줄기로 양분을 이동시키고, 이미 예고된 헤어짐에도 당황하는 우리에 비해, 지혜롭게 이른 봄부터 잎과 가지를 잇는 잎자루에 ‘떨켜층’과 ‘보호층’을 만들며 추운 겨울을 예비했습니다. 이제 낙엽을 떨어뜨릴 준비가 끝나고, 나무는 또다시 새 봄을 기다립니다. 나뭇잎과의 헤어짐은 다가올 봄을 기대하는 준비였습니다. 우리도 헤어짐을 섭섭해하지 말고, 나무처럼 또다시 만날 기쁨을 예비해야겠습니다.
박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갑니다. 새들은 에너지의 중심이 날개에 있어, 걷는 피로를 느끼지 못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에너지의 중심이 머리와 엉덩이에 있어서 걷는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걷는 피로를 함께 느끼며 헤어짐이란 무거운 산 그림자에서 벗어납니다.
~ 토카치다케를 오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