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기행

숲기행~정갈한 돌벽 계족산성

수풀7 2020. 11. 13. 00:11

-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는 계족산(鷄足山 423.6m), 계룡산(845m) 높이의 절반이지만 정상에는 돌로 쌓은 계족산성이 웅장합니다. 사적 제355호인 계족산성은 대전 8경 중 하나이며, 테뫼형 산성으로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으로 추정되며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이 계족산성을 근거지로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했고, 조선말 동학 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

오래된 병 속의
씻기 어려운 먼지처럼
막연한 기다림이
최근 들어 걷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걷는 일이 귀찮고 힘들지만 걷기를 통해 얻을 것이 많은 가 봅니다. 도시생활에 지친 우리에게는 오래된 병 속의 씻기 어려운 먼지처럼 늘 마음 한 구석에 찌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 먼지는 막연한 기다림, 걷는 일은 기다림에 지친 무료함을 덜 수 있는 좋은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계족산성으로 가는 길은 붉은 황톳길이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의 스트레스로 지친 사람들은 계족산 황톳길을 찾습니다. 특히 이 길은 초록의 숲과 붉은 황토가 어우러지고, 4월부터 10월까지 주말(·일요일 오후 3)마다 열리는 맥키스오페라 뻔뻔한클래식’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까지 더해지면서 도시인의 힐링코스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계족산은 삼국시대에는 항아리 같다고 해서 옹산(甕山)’이라고 불렀으나, 신라통일 이후 산의 줄기가 닭의 발과 비슷하게 갈라졌다고 하여 계족산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또한 지금의 회덕 일원인 송촌에 지네가 들끓어 닭을 상징화함으로써 지네를 없애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습니다.

계족산은 봉황산(鳳凰山)이라고도 불렀는데, 봉황산 아래 정착한 동춘당 송준길 등 송 씨 가문에서 인재가 많이 나와 그 시기심으로 격하시켜 계족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기로 인한 걸림돌은 여전 한가 봅니다.

570년 된 느티나무
세속의 바깥 초연물외
옛 선비들의 과거길 절 고개
계족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선비마을 쪽의 숲길이 무척 정겹습니다. 비래동에서 시작하는 숲길은 비래골로 향하고, 옛사람의 지혜가 담긴 570년 된 느티나무를 지나 잠시 오르면 오래되어 예스러운 느낌이 그윽한 옥류각에 이릅니다. 계곡을 끼고도는 길목 바위에 새겨진 세속의 바깥에 있어 초연하다는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초연물외(超然物外) 친필을 접하며 숙연한 발길을 옮깁니다.

옥류각 뒷마당을 슬쩍 올려다보면 비래사 대웅전입니다. 비래사에는 유형문화재 제30호인 목조비로자나불상이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보입니다. 비래사에서 계곡 길로 들어서 숨이 찰 정도 되면,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왼쪽으로 숲 모퉁이를 돌며 이어지는 산길로 십여 분 올라가면 너른 중턱의 절 고개에 이릅니다.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옛길인 절 고개에서 바라보면 동쪽으로는 대청호, 서쪽으로는 대전도심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갑천, 남으로는 계족산 자락인 매봉과 경부고속도로, 북으로는 신탄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절 고개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흘렸던 땀을 식히기에는 족합니다.

정상으로 접어들면 숲이 듬성듬성 보이며 햇살이 눈부십니다. 길옆으로 숲이 줄어드는 이유는 산성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산성은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야 적의 침입을 재빨리 알아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갈한 돌벽
탁 트인 전망
산이 울면 비가 온다
계족산성은 계족산 정상에 테를 두르듯 돌을 정갈하게 쌓아 만든 백제 산성으로 성 둘레가 1,037m인 가장 큰 산성입니다. 성벽의 대부분은 흙을 깎고 바깥쪽에만 돌을 쌓아 만들었으나, 동벽 일부는 안팎으로 모두 돌을 쌓고 내부를 흙으로 채우는 공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치성(雉城)은 성벽 밖으로 '치석'모양으로 돌출시켜 적이 성벽 밑으로 다가와 돌벽을 빼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화성성역 의궤”에 ‘치성은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 잘하는 까닭에 이 모양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여 꿩 ()’를 쓴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치성의 돌출된 것이 네모라면, 둥근 것은 곡성이라 부르며 계족산성에는 1개의 곡성이 있어 적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산성에는 남문터 부근에서 적의 출몰을 알리는 봉수대 터가 있고, 동쪽 낮은 지대에서 군사들이 사용할 우물과 저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산성을 지켰는지를 알 수 있으며, 신라군을 공격하는 백제군의 고함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회덕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 이르기를 하늘이 가물 때, 이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鄕人云天旱此山鳴則必雨)'고 말하며, 계족산 정상에서 무제(巫祭)라는 기우제를 올렸답니다. 무제는 물이 있는 갑천이나 평지를 두고 굳이 산 정상에서 지냅니다. 산이 울어야 비가 오므로, 계족산 정상(산신의 이마)에 장작과 생솔가지를 태워 산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랍니다. 산신이라도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장작이 타는 소리, 생솔가지의 시커먼 연기는 천둥과 비구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산신을 울게 해서 비를 부를 생각을 했을까요? 비를 원하는 민초의 간절한 마음이 계족산성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