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숲

치유의 숲~연필이 된 삼나무

수풀7 2021. 3. 5. 15:56

사각사각,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내기 고사리 손에서,
갓 들어온 미술학원 신입생 데생 종이 위에서,
새 상품을 꿈꾸는 패션 디자이너의 가는 손가락 사이로,
늙은 작가 돋보기 너머 흩어진 원고지 사이로,

연필 소리
어릴 적 어머니가 장독을 닦는 모습은 참 느긋하기도 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닦는 일에 몰두한다기보다 식구들 먹거리를 어떻게 장만할까 궁리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어젯밤 아버지와 다투어 불편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삭임의 과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빈 종이에 긁적거리는 연필 소리도 어쩌면 혼란한 속마음을 다잡기 위함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사각거리는 그 소리는 마치 우리 삶의 시작처럼 여겨집니다.

시작은 늘 그렇듯 서툴고 어색합니다. 혀끝에 연필심을 묻혀 개발 새발 썼던 글의 기억, 허접한 똥 종이에 꾹꾹 눌러쓰던 연필에서 풍기는 묘한 향에 잠시 졸던 받아쓰기 시간.. 연필은 그런 서툰 배움을 기억해내게 합니다.

연필 같이
연필은 가늘고 작습니다. 이 작은 연필이 가끔은 큰 세상, 많은 사람과 연결되게 해주기도 합니다. 작고 철없는 아이가 자라서 나름의 가치를 가진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연필도 작지만 큰 힘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큰 것을 추구하기에, 작고 의미 있는 걸 찾는 데는 좀 서툽니다. 작은 것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일,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은 연필 소리를 듣는 것처럼 행복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연필심은 잘 부러지기도 합니다. 부러지는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으려면 깎지 않고 그대로 둬야 합니다. 하지만 연필을 잘 사용하려면 반드시 깎아야 하고, 부러지는 아픔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연필은 쓰고 지울 수 있습니다. 지움의 자유, 나의 실수를 지울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일지도 모릅니다. 뿐 아니라 연필은 펜이 할 수 없는 밝고 어두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펜으로 할 수 없는 힘의 강약을 넓고 진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마술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연필이 된 삼나무
연필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운 향을 풍깁니다. 우리가 연필 향이라 기억하는 것은 사실은 삼나무의 독특한 향입니다. 연필은 주로 삼나무로 만듭니다. 삼나무는 어떤 물건으로 만들어도 뒤틀어지지 않습니다. 곧고 단단한 나무로 연필심을 받쳐주어야 심이 부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나무는 연필에 있어 흑연 못지않게 중요한 척추 역할을 합니다.

연필심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는 적당히 가벼우며, 진이 너무 많지 않고 향이 있어야 합니다. 삼나무로 만들어지지 않은 연필은 잘 부러지고, 고유의 향이 없어 연필을 쓰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삼나무 숲은 우리에게 연필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숲입니다.

지움의 연필
그림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를 보면 매우 날카롭고 세밀한 선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1452년에 이탈리아의 빈치에서 태어나 1519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1560년 이후에 만들어진 연필을 사용해보지 못한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 우리가 아는 흑연 심으로 만들어진 연필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빈치는 금속 침으로 그린 후 펜이나 가느다란 붓으로 잉크를 덧칠한 스케치를 했을 겁니다.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지금의 연필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쓰고 지울 수 없었던 연필 없는 세상은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마음 가는 대로 그려지고, 지워지는 연필 자국은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도 그렸다 지울 수 있는 마음치유도구이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지우개라는 또 다른 지움의 도구가 상처 자국을 말끔히 지울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기다란 연필이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짧아지는 모습은 마치 우리 삶의 여정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필을 쓰면서 전해지는 삼나무 향, 소소함, 사각거리는 소리, 지우기, 가만히 들여다보는 마음의 평안은 어쩌면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마음치유의 좋은 과정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