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숲기행

숲기행~흙돌담이 고운 성주 한개마을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56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격조 높은 선비문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살고 있는 전통 씨족마을로 다수의 전통한옥이 보전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개 동에 이릅니다.

한개마을 흙담장에는
유유한 아름다움이 흐르고
이웃을 향한 배려가 스며있습니다

한여름 햇살을 받으며 별고을(星州) 너른 들판을 달리다 보면 영취산 줄기를 따라 나지막하게 펼쳐지는 전통한옥마을이 눈에 듭니다.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이 인근인 이곳은 전형적 배산임수형의 길지(吉地)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초 성주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어서 역촌이 들어서고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어 늘 중인들이 득실거리며 북적거렸다고 합니다. 조선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는 성주읍은 체통 있는 양반이 살 고을이 못 된다고 생각되어 한개마을로 이주하였고, 현재까지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담고 있는 한개마을에는 가옥 70여 채가 고스란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개'라는 이름은 '큰 나루'라는 순 우리말입니다.. 크다는 뜻의 '', 나루라는 의미의 ''가 합쳐진 말이지요. 옛날 마을 앞에 있던 나루 이름이 바로 '한개'였고,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예전에는 마을 앞의 나루터를 '대포(大浦)'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마을을 들어서서 진사 댁 가는 길을 따라 오르면 이웃을 가르는 흙담장의 선이 유유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오래된 대문에서는 금방이라도 흰 치마저고리의 조신한 성산이 씨 며느리가 종종걸음으로 된장 종지를 들고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마을은 묘하게도
부엌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여자를 닫힌 공간에 두려합니다.

옛 한개마을은 영취산 기슭인 마을의 위쪽을 한개 혹은 윗마라고 부르고, 동쪽을 동녘, 서쪽을 서녘이라 했습니다. 진사 댁 길 둘레는 도촌, 아래쪽은 아랫 막 또는 아랫 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마을은 묘하게도 집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여자들의 공간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구조를 살펴보면 안길, 샛길, 사랑채, 안채의 구성이 잘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안채가 항상 가장 안쪽에 놓여있어, 여자의 활동공간인 부엌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여자를 닫힌 공간에 두려는 유교사상의 발로라고나 할까요.

돈재 이석문이 의금부도사로 호위무관이 되었을 때, 영조가 세자를 죽이고자 하여 뒤주에 돌을 들어 놓으라는 어명을 끝내 거절했답니다. 영조의 노여움을 산 이석문은 곤장을 맞고 낙향하여, 사랑채 담장을 헐어 출입문을 북쪽으로 내고 북비(北扉)’라 이름하고 사도세자를 추모했는데, 이곳이 바로 북비고택입니다. 넓고 편안한 문을 버리고, 낮고 좁은 북비를 택한 이석문의 곧은 기개를 한적한 고택 담장에서 접하게 되는 일은 유쾌한 일입니다.

마을은 지친 나그네의 본향처럼 햇볕이 화사합니다. 자연스레 굽은 담장은 이웃을 향한 배려가 스며있고, 그 아래 온갖 화라도 다 가라앉힐 것 같은 노송 한그루가 의젓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