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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기행

숲기행~섬진강 물돌이동을 휘돌다

- 전북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187, 천내리와 구담리를 합해 행정구역상 천담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천담마을, 구담마을을 혼용해 부릅니다. 활처럼 휘어 흐르고 깊은 소()가 많다 하여 천담(川潭)이라 부르고, 이 강줄기에 아홉 군데의 소()가 있다 하여 구담(九潭)이라 부른답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물에 자라()가 많이 산다고 구담(龜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진뫼마을은
물우리의 끝이고
물돌이동의 시작입니다

며칠 사이 봄비가 내리더니 개울물 소리가 정겹습니다.
졸졸거리고 흐르는 물길 사이로 들꽃 몇 송이 피어, 걷는 발걸음을 멈추게 만듭니다. 빗물의 흔적을 따라 걷는 발길은 잠 덜 깬 어린아이의 살결이 닿듯 포근하고, 흙냄새 맡은 숲은 어느새 푸릇한 물기가 가득합니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진안 백운의 데미샘에서 시작되는 섬진강 물줄기는 임실의 산을 구비 돌아 작은 산골마을을 휘감고, 순창을 흐르며 기이한 바위의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보성강과 몸을 섞으며 구례 벌판을 적시곤, 하동 화계장터를 거쳐 600 리 물길을 만들며 광량만으로 흘러갑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누이의 포근한 젖가슴처럼 모든 애환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물길은 섬진강 윗물 물우리 마을을 지나며 커다란 회오리처럼 휘돌아 흐릅니다. 진뫼마을은 물우리의 끝이고 물돌이동의 시작입니다. 마을을 감싸며 긴 산이 있어 진메, 질메, 장산이라 부르며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나지막한 마을에 앉으면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했던가, 삶이 그렇듯 느린 걸음의 들판에도 높낮이가 있나 봅니다.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며 물은 세상의 것을 오직 섬길 뿐, 결코 다투지 않고 피해 흐르며, 모두가 원하지 않는 낮은 곳을 향할 뿐이다.”라는 노자의 도덕경이 생각납니다.

자라가 많아
구담마을이 된
‘안담울’

13회 풀꽃상을 자랑스레 안은 느티나무를 등지고 진뫼마을 다리를 건너면 물돌이동을 옆에 끼고 오붓한 오솔길이 펼쳐집니다. 걷는 발길에 자작한 물기를 느끼며 초록의 숲길을 걸으면, 긴병꽃풀과 갖가지 제비꽃이 자지러지게 피어 바쁜 세상일이 까마득해집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한, 백석의 나타샤를 향한 그리움이 생각납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걷다 보면 풀벌레 소리, 물소리가 정겹게 어우러지고, 먹이를 노리던 왜가리의 음흉한 속마음이 걷는 이의 발걸음에 놀라 푸드덕 날아오릅니다.

강을 건너면 깊은 소()가 많다고 이름 지은 천담마을이 아늑하고, 시인은 몰돌이동의 흐름을 가장 아름다운 물굽이로 꼽았는데, 그 마음을 넉넉히 헤아리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이윽고 나지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앞 개울에 자라가 많아 이름 지어진 구담마을이 반겨주고, 옛 이름이 ‘안담울’이라는 이 마을 언덕에는 당숲이 자리합니다. 당숲 언덕에 서서 늙은 느티나무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건넛마을의 강줄기는 한 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인 이곳은 비록 괴롭고 아픈 시절이었지만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고 말하는 이광모 감독이 촬영을 위해 전국을 7개월간 돌며 찾은 곳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에는 창희는 방앗간을 기웃거리다 엄마 안성댁과 미군의 정사 장면을 목격하고, 방앗간을 불 질러 미군이 죽고, 이듬해 여름, 밧줄에 묶인 채 죽은 아이 시신이 발견되고, 그 시신이 창희라 여긴 친구들은 작은 무덤을 만들어 주는데, 그곳이 당숲이었습니다..

섬진강 물에는
시인들의
슬픈 시어가 흐르고

슬픈 당숲을 내려오자 안담울을 흐르는 개울의 징검다리는 지난 비로 물이 불어 발목만큼 잠겨있습니다. 황순원 선생 소나기의 한 장면처럼 다리를 동동 걷고 야위어 새털 같은 소녀를 등에 업어 봅니다. 짜릿한 전율이 등 뒤를 따라 차가운 개울물 사이로 전해집니다. 이 징검다리는 실제로 ‘TV문학관의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회룡마을 물굽이가 보이고,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구담마을의 언덕은 무릉도원입니다.

옛 부터 무던한 삶을 영위해왔던 섬진강변은 강을 경계로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이기도 하여, 숱한 다툼으로 인해 민초들의 아픔이 묻어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전라도 지역의 전투가 최초로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고, 한때는 마을의 지배계급에 대항한 농민반란이 강하게 이어졌고, 일제 압박 이후에는 항일의병 투쟁도 격렬하게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이념 분쟁으로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하였지요. 이런 고통의 시련을 통해 시인들은 섬진강 물에 아련한 슬픔이 깃든 시어(詩語)를 물길 따라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회룡마을에서 장군목으로 이어지는 낮은 언덕을 넘어서면 생김새가 요강 같다고 지어진 요강바위둘레로 섬진 물살이 빚어낸 아름다운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군목은 풍수지리상 그 일대에 ‘장군대좌(將軍大坐)’의 명당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요강바위에는 아들을 얻지 못한 여인이 바위구멍을 향해 소변을 보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달라진 세상이 되었지만 아들을 선호하는 사회적 통념 속에는 다분히 여인을 천하게 여기는 생각이 숨어있음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발길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