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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용 교수~예천 모시골 상상 여행

  이른 새벽에 저는 차를 몰고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동남쪽이 되겠네요. 이번 여행은 경상북도입니다. 청송, 안동. 예천의 산을 가보려고 합니다. 청송과 안동은 대학생 때 가 본 적이 있어서 초행은 아닙니다만, 기억에는 감동만 남아있어서 마치 첫걸음처럼 설렙니다. 청송의 주왕산, 안동의 계명산을 오르고 그리고 예천의 모시골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을 만나려고 합니다. ‘모시골’은 제 상상 속에 있는 마을입니다. 물론 실제로도 존재하는 곳이기는 합니다. 가 본 적이 없는 곳이기에 상상 속에서만 여러 번 여행을 한 곳입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깊은 산골의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모시골은 얼마나 깊은 산골일까요? 제가 처음 모시골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는 두메산골을 잘못 발음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말을 공부하는 저는 지명에 관심이 많습니다. 산의 옛말이 ‘뫼, 메’니까 뫼골이나 모이골이라는 말이 변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시골을 찾아보니 우리나라 여러 곳에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 많았습니다. 지명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땅 이름은 지형적 특성을 포현하는 경우가 많아서 수많은 지명이 같은 이름을 갖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남산이나 밤골이 있습니다. 남산은 우리말로는 앞산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예전에는 남쪽을 ‘앞’이라고 했습니다. 앞산을 한자로 바꾸면서 남산이 되었을 겁니다. 어찌 보면 남산의 이름을 찾아주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서울의 남산만 하더라도 ‘목멱(木覓)’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다른 남산도 제 이름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앞산으로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앞산에는 따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앞산인 남산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앞이 산으로 꽉 막혀 있으면 답답하겠지요. 서울만 해도 북한산, 도봉산, 인왕산과 남산의 모습은 차이가 있습니다.

  모시골이 있는 곳을 찾아보니 물이 좋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시골을 못골이라고도 부르는 곳이 있었습니다. 못골은 못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지요. 제가 찾고 있는 예천의 모시골에는 못은 없었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못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의 못이 지금은 메워진 곳도 많기 때문입니다. 대신 지금의 모시골은 계곡물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상상하는 모시골은 맑은 물이 계곡을 세차게 흐르는 시원한 광경입니다. 가재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모시골은 깊고 깊은 산 속에 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모시골의 돌들은 검습니다. 아마 먼 옛날 화산의 흔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화산이 언제쯤 터졌을까요?

  지금은 검은 돌 사이로 깊은 어둠이 내려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 깊은 산골의 어둠은 별을 빛나게 합니다. 더 깊은 정적을 풀벌레 소리가 울리며 지나갑니다. 모시골에는 반딧불이가 천지입니다. 스스로를 드러내며 마음껏 어둠을 즐기는 모습입니다. 별이 어두운 물가에 내려온 셈이네요. 별은 하늘에도, 물가에도, 우리 여린 마음에도 빛나고 있습니다. 예천의 모시골에서 세계 곤충 엑스포가 열린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예천의 모시골은 산이 너무 깊어서 전란의 피난처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형이 어머님을 모시고 피난을 간 곳이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정도입니다.  모시고 갔다고 하여 모시골이라고 했다는 민간어원도 있네요.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산골이라고 합니다. ‘월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영화 속의 동막골도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너무 깊은 산골에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모여사니 굳이 서로 빼앗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게 의외로 득이 되기도 합니다. 싸울 일보다 나눌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모시골이 제 상상 속에 자리하는 이유는 어머니 덕분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가끔 모시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원도 김화가 고향이셨던 어머니는 한국전쟁이 휴전을 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오시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정을 거치고 거치며, 열 살이 좀 넘는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경상도 예천의 깊은 산골 모시골에 오시게 된 겁니다. 수 백 년 전 임진왜란 때도 피난이 있었는데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난리를 겪고 모시골에 오신 겁니다.

  어머니가 살던 곳에는 집이 두 채만 있었다고 합니다. 아랫마을에는 집이 더 있었지만 정말로 깜깜한 산 속에 두 집이 사는 곳입니다. 맑은 개울소리가 너무나도 좋았던 곳이고, 배고픔을 달랠 도토리와 머루 그리고 다래가 천지에 있었던 곳입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3년을 사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화전을 일구며 사셨다고 합니다. 조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고 하네요. 3년 후에 땅의 기운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모시골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미국에 살고 계십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국까지 건너가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강원도 김화 오성산 아래에서 태어나서 전쟁을 겪고, 전쟁 후 경상도 예천 모시골에 와서 살다가 서울로 오셔서 후암동, 이태원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고 담담히 이야기를 하십니다. 모두 힘든 시기였으니 어쩔 수 없었겠죠. 묘하게도 나 혼자 힘든 게 아니라 모두 다 힘들면 힘든 것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기에 전화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효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효도라기보다는 제게 더 큰 기쁨과 위로의 시간입니다. 이제 연세가 많아진 어머니께 옛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저한테만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힘이 납니다. 웃음도 넘칩니다. 나이가 들면 이상하게도 며칠 전의 일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옛일은 더 선명합니다. 숫자도 참으로 정확합니다. 사람들 이름이나 지명도 정확합니다. 계곡이 좋았다는 이야기나 하늘의 별이 참 밝았다는 이야기나 반딧불이가 정말 많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모시골 이야기는 제가 직접 본 적은 없는 풍경입니다. 저의 고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상상 속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여행을 다녀온 곳입니다. 어쩌면 그곳에 가면 10대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말씀과 똑같은 모시골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수도 있겠네요. 모시골에 가 봐야겠습니다. 이 새벽, 빛을 맞으며 길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