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는 오늘 아침도 흰 눈이 펑펑 내립니다.
홋카이도의 3월은 애기괭이눈이 싹트는 한국의 3월과는 사뭇 다릅니다.
긴 겨울 터널을 지나며, 고향에서 볼 수 없던 눈을 한없이 볼 수 있긴 했지만, 오랜 시간을 대부분 혼자 혹은 작은 공간에 갇힌 듯 지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눈과 함께 마치 불통의 시간을 맞이한 듯 서로 간의 왕래도 불편해집니다. 사람들의 걸음은 쌓인 눈으로 인해 오히려 빨라지고, 시선은 미끄러운 얼음길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눈(眼)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미끄러지기 일쑤인 눈길을 걸으며, 눈(雪)으로 인한 생활의 불편을 느끼곤 합니다.
꼭 만나서 소통해야 할 중요한 일들도 눈으로 인해 대부분 SNS를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어렵게 만나는 번거로움을 들고, 빠르게 모든 일이 해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세상일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답답했던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오호츠크해를 바라볼 수 있는 아바시리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새벽 일찍 출발 준비를 마치고, 삿포로역에서 출발하는 6시 56분 '오호츠크1호'에 몸을 싣습니다. 열차는 낡고 오래된 물건처럼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철걱거리는 기차소리가 흰 눈 벌판으로 퍼져나갑니다. 삿포로에서 비바이, 스나가와, 타키카와, 후카가와, 아사이카와, 카미카와, 시라타키, 엥가루, 이쿠타하라, 루베시베, 키타미, 비호로, 메만베츠, 아바시리에 도착하며, 홋카이도의 많은 강과 설원(雪原)을 지나 장장 5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10분이 늦은 12시 27분입니다. 연착의 이유는 키타미로 오던 도중 기차에 사슴이 부딪혀 약간의 처리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혼마치(本町)를 걸어 도착한 선착장에서 유빙 쇄빙선 오로라호를 타고 오호츠크해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유빙을 즐기려 했지만,, 안타깝게 날씨가 따뜻해 유빙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짧은 여행이라 도후츠호, 북방민족(아이누족) 박물관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잠시 짬을 내어 아바시리 호수에 구멍을 뚫고 빙어낚시(와카사기쯔리)의 짜릿한 맛을 느끼며, 또 하나의 홋카이도 겨울 추억을 만듭니다.
길은 지속가능한 흔적과 다양한 경험의 누적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여행정보를 얻기 위해 빠른 검색과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길을 걸으며 지역민과의 만남을 통한 어눌한 표정 언어의 소통이 걷기의 즐거움을 더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또 깨닫습니다. 특히 친절한 택시운전사 시즈노카씨를 만나 유빙 영상 등 다양한 도움을 받으며 절친의 기회도 만들 수 있어,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꼭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빠른 인터넷 통신과 SNS 시스템이 발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통’에 대한 불편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족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통신의 발달로 휴대폰이 만능인 이 시대에 잠시 차 한 잔 하며 걸 수 있는 부모 자식 간의 통화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통신회사가 문제일까?
통신회선이 문제일까?
통화량 폭주가 문제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주인의 마음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소통의 부재는 가족에게 한정된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지역의 갈등도 큰 몫을 차지합니다.
통신기술은 극도로 발달했지만, 지역의 현안을 소통할 수 있는 회선은 매우 부족합니다.
어떤 회선?
사람과 사람 사이‘마음의 회선’입니다.
통신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소통의 고통이 해소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을 자면서도 휴대폰을 놓지 못하는 휴대폰족을 둘레에서 보며, 쏟아지는 지식의 홍수에 스스로 빨려 들어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참 불쌍해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탈진증후군(burnout syndrome)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오직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마음의 불안으로 빨리빨리 모든 것을 해치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소통이 오히려 방해꾼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시대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쌍방의 주관이 각각의 주관을 유지한 하나의 상호관계, 이러한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아이를 길러본 엄마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반적 사실입니다. 아이는 뭔가를 원할 때 아이의 표정과 언어로 웁니다. 엄마는 아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이의 언어를 이해합니다. 엄마와 아이는 각자의 주관적 생각을 통해 한 가지 공통된 시점을 깨닫게 됩니다. 드디어 아이는 엄마의 정서적 상태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표정을 만족하게 마무리합니다. 이런 관계를 ‘함께 보기’라고 하며, 모든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남들과 함께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함께 공유할 때 그 기쁨이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정서적 공유 없이는 소통하기 힘듭니다. 정서적 공감이 말보다 앞서야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소통의 세 가지 요소는 말(7%), 억양(38%), 표정(55%)인데, 말은 소통에서 아주 낮은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의 시대에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정보의 빈틈’입니다. 정보가 머릿속에 꽉 차 있으면 소통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일수록, 고집불통일수록, 소통의 여지는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지식인의 머릿속에는 주로 창조적 삶을 방해하는 조급함과 불안이 가득합니다. 불안은 전체를 지각하는 능력을 감소시키게 되고, 사냥꾼처럼 오직 한 곳을 향해, 둘레를 배려할 여유도 없이 걸어갑니다.
우리에게는 내 머릿속을 정리하고, 내 생각을 상대에게 천천히 표현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온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운 코로나 세상에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잠시 잊었던 나 자신의 존재를 다시 되찾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남의 생각을 함께 들어주는 ‘소통의 여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통신의 발달이 원활한 소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통신의 발달을 우리가 직시하고, 기기에 의존하는 삶에서 감성에 가까이하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도 식탁에서 아침식사를 사이에 두고 휴대폰에 고개를 숙이고 홀로 히죽거리는 가족이 없어지면 좋겠습니다.
마주하면서도 마주하지 않는 시간...ㅠ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눈을 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무는 어린싹이었을 때부터 늘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래서 맑고, 밝고, 지혜가 하늘처럼 넓습니다.
한평생을 살아온 늙은 나무는 소통의 달인입니다.
다 들어주고, 다 참아주고, 말없이 스스로 깨닫게 해 줍니다..
홋카이도 아바시리 오호츠크해에서 유빙 쇄빙선을 타고 유빙을 만나다~
'숲길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삿포로 걷기~마코마나이 사쿠라야마 숲길에서 (2) | 2021.07.23 |
---|---|
삿포로 걷기~물방울의 합창 (8) | 2021.05.04 |
삿포로 걷기~니시오카 숲을 걸으며 (2) | 2021.02.04 |
삿포로 걷기~토카치다케를 오르며 (2) | 2020.11.10 |
삿포로 걷기~홋카이도대학 식물원 (6) | 2020.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