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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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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걷기~미우라 아야코의 숲에서 보내온 편지 요즘은 틈이 나면 한가히 숲을 걷는 것이 일상의 茶飯事가 되었습니다. 천천히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는 것처럼... 차를 마시는 것은 그 맛을 느끼기보다는 김이 오르는 찻잔을 바라보며 멍하니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한자말에 ‘끽다(喫茶)’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중국의 옛이야기 ‘끽다거(喫茶去)’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상대적 사유를 초월한 평상심 즉 ‘차나 한잔하지 그래...’라는 뜻을 가집니다. 삿포로에는 유난히 찻집이 많습니다. 일본의 찻집을 ‘喫茶店(킷샤텐)’이라 하는데, 공손한 주인이 직접 간단한 식사와 갖가지 디저트를 대접하는 가게를 말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킷샤텐’에서 한가히 앉아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친구를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차와 다과를 즐기는 관습이 ..
삿포로 걷기~마코마나이 사쿠라야마 숲길에서 마코마나이 사쿠라야마 숲길은 초록세상입니다. 삿포로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과 함께 숲길을 걷는 것은 요즘 들어 가장 즐거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언어가 서로 달라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숲의 아늑함을 함께 느끼며 걷다 보면 삶에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 것인가를 서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여름 숲길에는 갖가지 풀꽃들이 우리를 반깁니다. 개망초, 파리풀, 짚신나물, 이삭여뀌, 쥐꼬리망초, 숲 속 요정 수정난풀... 숲 속은 그야말로 여름 꽃 축제가 벌어집니다. 발걸음이 이시야마녹지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햇살이 걷는 걸음을 점점 힘들게 만듭니다. 일행은 부채를 부치고,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힘들게 걷습니다. 이미 삿포로의 바깥 온도는 35℃를 넘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같이 걷는 사람..
삿포로 걷기~물방울의 합창 삿포로의 봄은 지난겨울 참 멀리도 여행을 떠났었나 봅니다. 4월이 훌쩍 넘은 지금, 상습 지각생 봄은 저 너머 언덕에서 아침 햇살에 조는 고양이처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고국은 지금 벚꽃이 벌써 졌는데, 삿포로의 봄은 아직 저만큼 있습니다. 어젯밤은 비가 내렸습니다. 여명(黎明)에 쌓인 숲은 새벽별이 쏟아져 물방울 되어 영롱합니다. 숲은 곧 조용한 합창이 시작될 듯 고요합니다. 경탄스러운 친밀감으로 엉겨 붙은 방울들은 낮은 가지로 흘러내리며 겸허의 떨림을 만들고, 나무는 마치 선율에 취한 지휘자처럼 온몸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후드득, 새벽기도 나서는 외할머니 등 뒤 마른기침처럼, 무거운 짐을 주체 못 해 떨어져 내리는 몸이, 잘게 부서지며 아직 잔설(殘雪)이 남은 숲 바닥을 적십니다. 오래전 ..
삿포로 걷기~'오호츠크1호 특급열차'를 타고 '아바시리'로 삿포로는 오늘 아침도 흰 눈이 펑펑 내립니다. 홋카이도의 3월은 애기괭이눈이 싹트는 한국의 3월과는 사뭇 다릅니다. 긴 겨울 터널을 지나며, 고향에서 볼 수 없던 눈을 한없이 볼 수 있긴 했지만, 오랜 시간을 대부분 혼자 혹은 작은 공간에 갇힌 듯 지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눈과 함께 마치 불통의 시간을 맞이한 듯 서로 간의 왕래도 불편해집니다. 사람들의 걸음은 쌓인 눈으로 인해 오히려 빨라지고, 시선은 미끄러운 얼음길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눈(眼)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미끄러지기 일쑤인 눈길을 걸으며, 눈(雪)으로 인한 생활의 불편을 느끼곤 합니다. 꼭 만나서 소통해야 할 중요한 일들도 눈으로 인해 대부분 SNS를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어렵게 만나는 번거로움을 들..
삿포로 걷기~니시오카 숲을 걸으며 우리는 나무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 나무는 수피가 특이해서, 저 나무는 잎이 갸름하고 예뻐서, 그 나무는 알맞게 굽은 몸매가 멋있어서, 라고 말합니다. 나무는 지금의 모습을 위해 오랜 세월을 속이 문드러지는 아픔과 추위와 해코지를 이겨왔는데,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인고(忍苦)의 삶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은 잠시 서서 자신의 생각으로 말해버립니다. 나무는 참 한심했거나, 서운했겠지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서 그저 가만히 바라봐줍니다. 가는 가지 끝의 떨림으로 말해줍니다. 자신을 향한 철없는 생각을 다독거려 줍니다. 니시오카공원은 커다란 수원지를 중심으로 츠키사무 강과 상류지역의 습원, 그리고 울창한 삼림이 우거져 느리게 걸으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한적한 숲길입..
삿포로 걷기~토카치다케를 오르며 서툰 걸음마는 우리를 웃게 만들고, 서툰 눈물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며, 서툰 헤어짐은 준비되지 않은 아쉬움으로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삿포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뜻밖에 좋은 친구를 얻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함께 참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가을이 가만히 내려앉은 '토카치다케'를 함께 오릅니다. 마가목 붉은 산등성이를 오르며 산은 참 아량이 넓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친 사람, 화난 사람, 실망한 사람, 기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없이 다 받아주는 산의 포근함을 만끽하며, 지녔던 아쉬움을 한발 한발 산자락에 내려놓습니다. 떠나왔던 도시의 삶에서는 '면역적 경계선'으로 인해 안과 밖,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하찮은 마스크로라도 낯선 것..
삿포로 걷기~홋카이도대학 식물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가끔은 말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은 하고 싶지만, 말을 하게 허락하는 마음이 뭔가 복잡한 이유로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말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은 '말의 문' '말문'입니다.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마음에 없는 말문을 함부로 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의 결정이 있기 전에 입이 먼저 열리는 말, 그런 말을 우리는 영혼이 결여된 말, 혹은 절제가 부족한 말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급한 나머지 마음이 말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튀어나와버리기 때문이겠지요. 아마 '배려'라는 여유로움이 부족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배려는 마음 깊은 곳에 고인 지혜의 맑은 샘. 배려가 깊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
삿포로 걷기~샤코탄에서 챠렌카의 그리움을 샤코탄~ 짙은 코발트 빛 바다가 그리워 망망한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땅끝. 바닷바람 맞은 소금빛 하얀 등대 외로이 서 있는 곶(串). 이국의 언어지만 그 뉘앙스에서 풍기는 그리움이 저절로 걸음을 이끕니다. 우리는 늘 그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때 목걸이를 두서너 개 걸쳤던 어릴 적 친구에 대한 그리움, 구수한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고향마을에 대한 그리움, 학창 시절 뒹굴고 놀던 교정에 대한 그리움, 먼 이국으로 떠나버린 이웃에 대한 그리움, 허공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하늘을 향한 그리움, 뙤약볕에 파르르 떠는 꽃잎의 바람에 대한 그리움, 간절한 기도 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 얼마 전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하지만 가장 사무치는 그리움은 사랑하는 이의 떠남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