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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

치유의숲~어머니의 빨간 지갑

어머니는 추석 전날에 푸른 하늘길을 떠나셨습니다.
떠나시기 전 어머니는 애타게 빨간 지갑을 찾으셨지요. 평소 늘 허리춤에 지니고 있었던 그 빨간 지갑에는 고무줄로 꽁꽁 묶은 지폐 몇 장과 함께 어머니의 추억 부스러기들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빨간 지갑을 찾았던 이유는 그 지갑 속에 있는 지폐 몇 장을 평소 자기에게 친절했던 간병인에게 추석 보너스로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무줄에 묶였던 지폐는 아들인 내가 어머니 간병을 위한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다 써버린 후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다 파먹고 텅텅 비게 만든 빨간 지갑을 생각하며 자식인 나의 마음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요. 나는 슬며시 뒤로 돌아 내 가난한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 어머니께 싱긋 웃으며 건네주었고, 곧 그 지폐는 간병인의 주름진 손에 쥐어졌습니다. 지금도 간병인 아줌마와 어머니가 주고받았던 그 따뜻한 눈길은 내 눈시울을 젖게 만듭니다.

어머니 냄새

어머니는 명절이 되면 여러 개의 봉투를 준비하셨습니다. 평소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정이었지요. 그리고는 명절 전날이면 슬며시 그들의 손에 자신이 마련한 따뜻한 정을 꼬옥 쥐어주셨습니다. 시장의 단골 생선장수, 자질구레한 일을 도와주었던 이웃 아줌마, 동네 쓰레기를 치워주었던 아저씨, 그리고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몇몇 사람들...

어머니는 동네의 오래된 큰 나무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나무 그늘 아래 함께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몸에서는 할머니 냄새가 난다.”라고 까불대는 손자를 바라보며 흐뭇해하셨지만, 어리석은 나의 귀에는 그 말이 어머니 냄새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라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은 듯 아들인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병문안을 게을리하다 이제야 가슴을 치는 후회를 합니다. 오랜 병상에서 오는 어머니에 대한 불손, 경시, 외면의 현실이 자꾸 되돌아보게 됩니다. 옛 사람들의 냄새는 삶에서 곧 사라질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냄새는 숲의 향기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기억

봄이면 어머니는 화사한 벚나무 아래로 내 손을 잡고 걸으셨습니다.
싱긋이 미소를 머금은 어머니의 모습은 어쩌면 먼저 떠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연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어머니이기에 앞서...
어머니 병문안을 오는 분들의 한결같은 말은, 참 많이 베푸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셨습니다. 세상이 어려워 잠시 숲에 드는 사람들에게 포근하고 넉넉하게 받아주시던 편안한 숲 같은 분.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때였을 겁니다. 학교를 다녀와서 추운 몸을 녹이려고 부뚜막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인성아, 선생님이 뭐라 하시던?”, “좋다 하더나?” “아니요”, “밉다 하더나?” “아니요”,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숙맥이 같은 저를 보며 얼마나 웃으셨는지요.
재봉틀 하나로 뚝딱뚝딱 옷 한 벌을 만드시고, 다 죽어가는 꽃과 나무가 어머니에게 오면 모두 되살아났지요. 랑콤 파운데이션을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뾰족한 빗 끝머리로 하얀 크림 빛 로션을 콕 찍어 손가락에 묻혀 바르시면, 어머니의 품에는 수수꽃다리 향기가 묻어있었지요

온 식구가 연탄가스를 마셨을 때 어쩔 줄 몰라하시며 강판에 갈아 짜주시던 그 새콤달콤한 사과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과일상자 속의 썩은 과일은 늘 어머니 차지였고, 생선 대가리만 빨아먹으시던 어머니. 중풍으로 누운 할아버지의 병시중을 들기 위해 보리 눌은밥을 해서 나무 주걱으로 박박 긁어, 늘 손목이 아파했던 어머니.

숲이 되신 어머니

어머니의 삶은 굴참나무 껍질 같았습니다. 거칠게 터진 껍질은 부드럽고 푹신했지요. 일생을 흠집 많은 나무로 사셨지만, 숲처럼 평온하셨습니다. 90년을 넘게 산 어머니의 마지막은 뜨거운 불길에 탄 나무처럼 가벼워지셨습니다. 남은 몸이 가벼워지기까지 이렇게 긴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내가 아직도 안 죽었다...”, 어머니의 주어진 삶은 어쩌면 참 지루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수목장으로 조촐히 치렀습니다. ‘어머니 나무를 바라보면 따뜻한 물줄기가 물관을 타고 다시 푸른 잎으로 우리를 안아줄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모든 것은 이제 흙으로 돌아가고, 숲이 될 것입니다. 그리곤 또 다른 배려를 위한 삭정 개비가 되어 우리를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아프면 병원을 찾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어릴 적을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어머니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 몸을 낫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 ‘어머니 나무의 치유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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