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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기행

숲기행~고즈넉한 명재고택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은 조선 중기 호서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입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광채와 사랑채의 세련된 배치는 명재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옛 선조들의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 건축적 지혜입니다. 동쪽 언덕에는 400년 느티나무가 고택을 지키고, 남쪽 네모진 연못 작은 섬 위에는 300년을 함께 지켜온 배롱나무가 아름답습니다. -

노성산 산기슭
오래된 냄새가 나는
고택이 아름답습니다.

한적한 시골길, 발길에 채여 폴폴 피어오르는 흙냄새를 맡아보셨나요?
아득한 고향마을 바람결에 실려 오는 저녁 짓는 냄새를 맡아보셨나요?
이미 떠나버린 주름진 어머니의 그리운 몸 냄새가 생각이 나시는지요?
삶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오래된 냄새가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오래된 고택에 발걸음이 끌리는 것은 아마도 옛 추억으로 인한 삶의 흔적을 그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논산 땅 노성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기슭 양지바른 언덕에 고풍이 스민 한옥이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유학자 윤증 선생의 고택이지요. 소박하지만 잘 정제된 명재고택은 정감이 살아있는 농촌마을의 한옥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고택 옆으로 눈을 돌리면 넓은 들과 나직한 산이 있고, 둘레를 흐르는 도랑의 맑은 물이 과수원의 마른땅을 축여줍니다. 그 사이로 난 구부러진 마을길과 정겨운 우물이 한가롭습니다. 언덕 위 느티나무 높은 가지 위에서 까치가 울면 교촌리 마을에 반가운 손님의 발자국 소리 들리는 듯도 합니다.
명재고택 해 질 녘은 늦은 저녁연기 가득하고, 길가 던 늦은 손님을 맞이하는 희미한 외등 하나가 윤증 선생의 따스한 미소 같아 보입니다.

이은시사...
은둔의 때를 아는
백의정승의 거처

누마루 정면에는 ‘이은시사(離隱時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세파에 휘둘려 떠날 때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버리고 초야로 돌아와 은둔할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1709년 숙종이 윤증 선생을 우의정에 임명하였으나 14번의 상소를 올리며 끝내 사양했고, 임금이 내 평생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경의 생각은 잠시도 잊지 않았거늘 경은 어찌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하며 통탄해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나이 들어 병이 위독해지자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 선비의 예절로써 장사 지내고 명정(銘旌)에는 내 관직을 쓰지 말고 작은 선비라 쓰라”라고 엄히 당부했다는 이야기는 지금의 세태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줍니다.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오직 청백한 삶을 살아왔던 윤증 선생은 당시 사람들에게 백의정승이라 예우를 받았고, 그 부친과 함께 두 사람을 산림(山林)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산림은 조선시대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은 명망 있는 선비를 뜻합니다.

사랑채 동쪽으로는 야트막한 소나무 언덕을 만들어 고개 너머 마을길에서 직접 보이지 않도록 하고 사랑채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마을 들판을 엿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안채 대청마루에서 건너 창문 너머로 초가집을 보며 아랫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살필 수 있도록 했으며, 안방에서 사랑채 바깥에 있는 뒷간을 바라보고 사랑채로 오가는 손님들을 잘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바깥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도원인가...
400년 느티나무 아래
고운 장독대

사랑채 누마루 쪽문에는 연두색 글자로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둘레의 소나무와 사각형 연못이 잘 어우러져 무릉도원 같다는 표현으로 명재고택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택의 앞쪽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표현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네모진 연못과 작은 원형의 섬을 만들어 배롱나무를 심었습니다. 배롱나무는 꽃이 지고 계절이 바뀌면 모든 잎이 다 떨어져 자신을 비운다는 뜻으로 선비정신을 잘 나타낸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채의 구조는 대문을 열었을 때 그 안이 보이지 않도록 판자로 벽을 만들어 외부 시선을 차단하였습니다. 안주인의 거동을 보호하려는 배려인 듯 보입니다. 손님이 왔을 때 높은 벽으로 인해 내부가 잘 보이지 않고, 벽의 아래쪽은 약간 트여있어서 그 틈으로 손님의 행색을 잘 살펴서 여유를 가지고 몸단장과 손님맞이 준비를 하려는 지혜인 듯합니다.
안채와 광채 사이의 처마를 보면 북쪽으로 향할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이것은 과학의 원리를 잘 이용한 듯합니다. 여름 바람이 넓은 공간에서 빠져나와 좁은 곳에 이르면 속도가 빨라져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 북풍이 좁은 통로를 통과해서 넓은 공간으로 빠져나오며 속도가 느려지면 서서히 부드러운 바람으로 변해버리는 자연의 섭리를 잘 이용한 구조입니다.

동쪽 언덕에는 400년 넘은 느티나무 잎들이 고운 장독대 사이로 붉게 물들어 갑니다. 계절이 바뀌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 언덕에서 벌어질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