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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

치유의 숲~마을터줏대감 어르신

삼동(三冬) 바람에 코끝이 쨍합니다. 느지막한 새해 아침 논두렁길을 따라 걷노라면 햇살은 목덜미로 따스하기만 합니다. 저 건너 마을 들머리에 큰 나무 한그루 덩그러니 서 있고, 논두렁 사이로 쥐불 연기가 한가로이 피어오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겨울 들판은 이럭저럭 한 폭의 고운 수묵화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
한적한 마을길을 걷다 보면 마을 들머리에 한가로이 서 있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를 만납니다. 우리 땅의 대부분 마을에는 이처럼 큰 나무 어르신을 만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나무는 오랫동안 마을과 함께 울고, 웃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에는 마을의 이야기가 씌어져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아래 모여서 지나간 집안 이야기와 윗동네 어르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마을에 큰 잔치가 열리면 나무 아래에는 흐뭇한 후렴 잔치가 베풀어지고, 마을은 그로 인해 즐겁고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큰 나무 어르신은 마을과 함께 살아와서 아무나 해칠 수도 없습니다. 홧김에 베어버릴 수도, 미워 찍어버릴 수도, 작은 가지 하나라도 함부로 자를 수 없습니다. 큰 나무는 마을의 어르신이기 때문입니다. 내 어르신이고, 당신의 어르신인 큰 나무의 주인은 마을 사람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는 옛 어른의 입김이 스며있어서 그 흔적을 해쳤다가는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무의 몸짓
발가벗은 겨울나무의 몸짓은 고운 여인의 몸매보다 더 선명합니다. 한 치의 불공평도 없이 허공을 나누며 뻗어나간 가지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천년의 삶을 통해 확보해둔 틈새를 따라 4H연필로 그린 세밀화처럼 하늘을 그립니다.
모래틈 사이로 스며드는 작은 물줄기처럼, 거미줄 같은 옅은 얼음판의 균열처럼...오랜 기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수많은 가지에는 바람과 추위를 견뎌낸 삶의 무게가 실려 있고, 그 완벽한 균형은 작은 텃새의 수려한 놀이터입니다.

잊을 건 잊고, 기억할 건 기억한 가지의 끝에는 이제 다시 시작할 작품의 밑그림처럼 새 잎눈이, 꽃눈이, 신방(新房)처럼 꾸며집니다. 그 신비로운 세계 속은 새로운 감동이 어우러지고, 오래된 기와처럼 묵은 흔적의 유전자가 다소곳이 들어있습니다.

나무의 말씀
나무는 일평생 말이 없는데도 가만히 귀기 우리면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누군가 나무의 말은 냄새라고 합니다. 또 누군가는 나무의 말은 가지의 뻗음이라 합니다. 나무는 말없이 냄새로 가지의 뻗음으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제발 바쁘다는 핑계로 다양성을 무시하고, 빠르기만 한 일방적 의사소통의 악순환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숲의 나무는 느리게 사는 지혜를 지향합니다. 말보다는 그의 향기로, 몸짓으로 천천히 말하기를 원합니다. 숲길을 걸으며 나무의 그윽한 향기를 맡아봅니다. 나무의 향기 속에는 오랜 철학과 깊은 사색이 담겨있습니다. 나무에 가까이 귀 대어 보면 생명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흠뻑 빨아올린 물기로 나무는 다가오는 봄에 몇 개의 이파리와 몇 송이의 꽃을 피울 것인지를 가늠합니다.

마을 터줏대감 어르신
큰 나무 어르신의 둘레에 어느 듯 숲이 사라졌습니다. 나만 잘살기 위해 숲을 베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동네 바깥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돌아와 숲이 무성해지기를 천천히 기다려줍니다.
나무는 자기 키만큼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큰 몸을 떠받들기 위해서는 키만큼의 깊은 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 근본보다는 빠른 성장과 큰 열매를 더 선호합니다. 천천히 살아가는 나무를 어리석다고만 생각합니다. 그저 나무가 주는 혜택만을 누리며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입니다.

오래된 나무에게서 우리가 배울 것은 참 많습니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듯, 바쁨으로 생각을 잊은 이에게 마을 터줏대감 나무 어르신은 묵묵히 서서 말합니다. 천천히, 향긋하게, 깊게...